[유로 스코프] 우크라이나서 열리는 ‘판도라의 상자’… 미·러 갈등 넘어 한반도에도 영향

이재승 고려대 국제대학 장 모네 석좌교수 

유라시아의 체스판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2014년 민스크 협정으로 위태로운 봉합을 유지하고 있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새로운 전운이 감돌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뒤로 물러서라는 강경한 통첩을 보내는 한편, 동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다. 4150만 명의 인구와 독립국가연합 국가 중 둘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역사적 기원지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7월 발표한 에세이에서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주권은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며, 친서방 기조와 나토 가입 의사를 천명한 젤렌스키 정부에 대해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고 유라시아 지역의 패권 부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러시아가 적지 않은 정치적⋅경제적 피해를 수반할 전면전을 선호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향후 지구전과 게릴라전이 지속될 경우 러시아 측이 부담해야 할 장기적인 비용은 크게 증가한다. 실제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은 초청장을 동반한다. 무력화된 정부가 러시아의 개입을 요청하고, 해당 지역의 자국민과 친러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을 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국민투표나 선거의 형식을 빌려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행보는 “다 계획이 있는” 게임이다.

위기의 고조는 NATO의 추가적인 확대 가능성을 차단하고, 우크라이나를 확실히 완충지대화하는 한편, 미국으로 하여금 인도·태평양으로부터 유라시아까지 전선을 확대시키는 부담을 지게 한다. 금융 제재에는 이미 상당히 면역이 쌓여 있고 에너지 거래 단절은 유럽과 러시아 양측에 치명적이다. 중동과 아프간에서의 철군 이후 미국의 원거리 개입 역량은 불투명하고,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핵심 이익에서 벗어나 있다. 유럽은 여전히 리더십 부재와 분열을 보이고, 코로나 시기의 경제위기로 투입 가능한 안보 재원도 부족하다. 러시아로서는 크게 잃을 게 없는 게임에서 미국과 NATO는 무승부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 분주해진다.

동유럽의 체스판은 중국에 긴요한 학습효과를 준다. 미국이 동맹국과 파트너국을 다루는 방식은 동북아에도 그대로 투사된다.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중국이 대만 문제와 동아시아 전략을 가늠해 볼 잣대가 된다. 새로운 힘의 구도가 유라시아 지정학의 단층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국제정세는 다시 힘의 영역으로 기울어가고, 논리와 명분은 부차적으로 밀린다. 선의에 기반한 구두 약속일수록 위기 시에 취약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약속은 깨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역사의 비극은 반복될 수 있다.

대화에 기반한 외교적 해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거대한 체스판에 올라와 있는 말들은 얼마만큼의 자체적인 역량과 카드를 들고 있는지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강대국 경쟁 하에서 종종 당사국의 입장은 가려진다. 푸틴과 바이든이 주인공이 된 무대에서, 러시아의 강력하고 세련된 선전술 앞에 우크라이나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외교는 모호한 중립 기조와 일관성의 결여로 미국 및 유럽과 실질적 공조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지속된 위기에 둔감해지고, 내부적으로 취약한 거버넌스는 국제사회에 신뢰감을 주지 못했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모호한 정치적인 선택을 가져왔다.

완충지대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는 많은 긴장을 안고 살아야 한다. 러시아의 또 다른 접경국인 핀란드는 거대한 인접국에 맞서 ‘겨울전쟁’을 치르는 결기를 보였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내며 유럽연합과 국제정치의 주요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운명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선택과 역량에 달려있다. 국제정치에서 지정학적 고려로 누군가가 지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또한 힘의 대결에서 균형점 위에 서 있으려는 것은 흔들리는 외줄을 타는 것과 같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동맹을 맺고 외교 전략을 짜는지가 중요하다. 자유인지, 민주주의인지, 아니면 민족인지, 경제적 이해인지에 대한 근본적 우선순위 설정이 필요하다. 그게 혼재되고 미사여구로 덮이는 순간 약소국의 운명은 가늠하기 어렵다.

1945년 크리미아 반도 남단의 얄타에서 열린 강대국 간의 협정은 여전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중 경쟁과 인도·태평양 전략의 확장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까지 동북아로 불러들이며, 열강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구한말의 상황을 기시감을 가지고 재현시키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민족의 명분과 쇄국 논의의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7000㎞가 떨어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는 먼 나라의 일로 보이지만 유라시아 지정학의 단층대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거대한 판이 충돌하는 파열음은 점점 가까이 들리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물 안에서 보이는 작은 하늘의 모습에 함몰되어 있다. 멀리 볼 수 있어야 거대한 체스판에서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