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스코프] ‘에너지 퍼펙트 스톰’ 맞은 유럽… 푸틴은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폭염이 유럽의 여름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기 속에서 정작 큰 걱정은 겨울이 오기 전에 비축해야 하는 가스 확보에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전으로 들어가면서 러시아는 에너지 공급을 조이며 유럽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 가스프롬사는 대금을 루블화로 지급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불가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등 유럽 국가들에 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러시아로부터 오는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파이프라인의 정기 보수를 앞두고 공급 중단을 우려해 비상사태를 선포한 독일은 감소된 수준으로나마 재개된 가스 공급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럽 주요 도시의 전기료는 작년 대비 100% 이상 상승했고, 천연가스 시장은 작년보다 몇 배 오른 가격으로 널뛰기를 한다. 대(對)러 제재가 아직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제재의 책임과 여파를 유럽에 전가시키고 있다. 푸틴의 도박은 현재까지는 높은 승률을 보이고 있다.


지난 5월 유럽연합은 ‘리파워EU(RePowerEU)’ 계획을 발표하며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가스 소비량을 30% 감축하고 공급원을 다변화하는 한편, 에너지 소비를 13% 줄이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45%로 확대할 예정이다. 수소와 바이오메탄 생산도 늘리고, 2029년까지 새 건물에는 태양광 패널 설치가 의무화된다. 독일은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55%에서 35%로 낮추고, 장기적으로는 전면 중단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원전 국가들은 원자력 설비 계획을 재조정하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자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세웠지만, 각국이 처한 상황과 실행 방식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서·북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낮거나 대체공급원이 명확하고, 재생에너지 공급 여건이 양호한 편이다. 이에 비해 러시아발 파이프라인에 의존해 온 중·동구 내륙국의 경우 빠른 대체공급원 확보가 어렵고 화석연료 사용 비중도 높았다. 무엇보다도 시간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파이프라인 대신 LNG(액화천연가스) 설비를 갖추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인다는 방향성은 비교적 명확하지만, 실행 가능성과 비용 차원에서 상당한 시간 차가 발생한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산업 부문이나 일반 소비자들이 감당하기에 ‘2030년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원유나 금융제재에 비해 가스 공급은 유럽과 러시아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전략적 카드였다. 러시아 파이프라인은 이미 냉전 시기부터 운용되기 시작했다. 에너지 공급은 웬만한 정치적 상황에서는 예외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대금이 정확히 들어오는 한 공급을 보장한다고 자신했다. 유럽은 안정된 가스 수급을 바탕으로 경제적 상호의존을 통해 러시아와의 공존을 모색해 왔다. 독일도 ‘무역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handel)’라는 접근법을 주창하며 러시아와의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양자 간의 오랜 밀월 관계는 이제 마침표를 찍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의 셰일 혁명은 공급 부문의 숨통을 틔워주며 글로벌 석유, 가스 시장을 구매자 우위로 돌려놓았다, 에너지 가격의 안정은 에너지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낮추었고, 보다 과감한 에너지 전환에 대한 논의의 장을 제공했다. 코로나 시기는 더욱 특수한 상황이 되었다. 극도로 위축된 에너지 수요와, 새로운 비대면 라이프스타일의 도입은 화석연료 시기의 종말을 더욱 앞당길 수 있다는 ‘녹색 낙관론’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포스트 코로나 체제로 나아가고 에너지 수요가 다시 급증하는 과정에서 공급 부문의 투자 감소와 지정학적 불안정은 에너지 시장에 연이은 ‘퍼펙트 스톰(동시다발적 위기)’의 충격을 던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가져온 에너지 위기는 유럽의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와 ‘후퇴’가 앞에 놓인 기로에 던져놓았다. 물론 유럽이 여러 차례 강조한 에너지 전환의 방향성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고, 기후변화 대응의 필요성도 계속해서 증대하고 있다. 그러나 속도와 대응 방식에 있어 내부적인 간극은 소리 없이 벌어지고, 보다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최근 유럽의회는 EU 녹색에너지 분류체계(taxonomy)에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포함시키며 탄소 감축의 대응 기제를 확대한 바 있다. 에너지 전환 이행 단계에서 천연가스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지만 최근과 같은 수급과 가격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관심 증대는 탄소 중립을 위한 현실적인 불가피성을 반영한다.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그동안 낙관했던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에 대한 ‘진실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많은 유럽인에게 에너지 가격의 인상과 인플레이션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비용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유럽의 인내는 이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푸틴은 에너지 목줄을 조이면서 유럽과 미국이 지치고 분열하기를, 그리고 가드(guard)를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 올 때까지 러시아는 결코 서둘러 사냥에 나서진 않을 것이다, 유럽에서의 신냉전 구도를 규정할 첫 체스판은 에너지를 두고 벌어지고 있다. 공급 안보와 저탄소 전환이라는 두 개의 과제를 안고 유럽은 러시아와의 긴 게임에 나서고 있다. 끝까지 패를 내려놓지 않는 쪽이 이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대학 장 모네 석좌교수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705836?sid=103&lfrom=facebook&fbclid=IwAR2hfFYU2chIORLckxrdL8eSynvYCd73hpvX6BM-udhWoS_tO0hyF9i9WVA